top of page

브랜드 탐구일지 2부
​'풍경, 조경 커뮤니케이션의 발견'

(김희원, 롯데건설 디자인연구소)

2부의 주제는 브랜딩이 아니다. 그러니 브랜드 실용서를 기대했다면, 3부에서 탐구할 ‘공간브랜딩 전략으로서 정원설계론’ 혹은 ‘서비스 방법론과 조경 다이어그램 간의 관계’ 등을 기다려주시길 바라본다. 2부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지루한 ‘비평’이 될 것이다.

올해 방법론에 대한 탐구 일지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직무에서 공간, 시설, 콘텐츠의 브랜딩 경험이 쌓여갈수록, 새롭고 좋아 보이는 기법들을 맹목하고 있는 건 아닐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방법론은 성패를 성찰할 수 있는 내년이어도 충분하니, 조경에 있어 기술의 목적과 원리 그리고 방향을 탐구하는 일이 더 가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글의 순서는 브랜딩보다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로 시작한다. 둘째,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근원적 작동 원리를 정의하여 브랜딩의 의의와 조경의 시사점을 설명한다. 셋째, 조경의 이론을 살피고 커뮤니케이션을 탁월하게 다뤄낸 조경 사례를 분석한다. 넷째, 조경만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있으나 개념의 부족함을 보완하고자 ‘풍경’의 개념화를 제안하며 이론/기법/잠재력의 발전 방향을 제안한다. 뒤늦게 기고하게 된 변명으로 글을 마친다.


목차
1. 조경의 정체와 언어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2. 커뮤니케이션의 씨줄, 서사. 이야기하는 인간
3. 커뮤니케이션의 날줄, 심상. 시뮬레이션하는 인간
4. 브랜딩이 직면한 현실
5. 브랜딩의 역할과 조경의 시사점
6. 장소성, 참여설계와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7. 이론이 아닌 실천에서
8. 어떠한 풍경을 사람들에게 남겨 주고 싶은가?
9. 조경의 언어는 안녕하고 충분한가?
0. 끝으로, 그리고 다시 시작



조경이 더욱 필요한 시대라 조경가는 말하지만, 필자의 시선에서 조경이 외치는 역할은 섬세하고도 장대한데, 대중이 떠올리는 조경은 한없이 작고 인접 분야가 떠올리는 조경은 모든 일을 해내기 특수해 보인다. 사람들은 조경의 존재는 알지만, 그것의 실체는 모르며, 정체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조경의 존재감과 영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체를 모르는 대상이 존재감을 가지면 궁금하겠고, 영향력을 가지면 두렵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는 선에서 충분하고 종종 인식의 바깥으로 밀려나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조경 분야 바깥의 정책과 매체 속 안타까운 용례로 조경이 발견될 때가 많다. 조경을 한계 짓는 대중의 언어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조경의 언어가 우월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는 풍성한 표현 방식이 조경에 야박함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환경은 대게 우리가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방식의 산물“임을 고려한다면(1), 조경의 언어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가능성이 닫혀 있다는 사실에 통감하게 된다.

이때 전문가로서 ‘옳은’ 표현을 공론화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조경가가 주목하고 다뤄 온 서정과 상상, 인상과 감상의 풍요롭고 다채로운 언어를 대중에게 선물하는 일도 중요하다. 소통이라는 짐은 오롯이 조경가만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 근본적으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현 시대 문학의 서술 방식에 대해 여전히 “우리에게는 언어가 부족하고, 관점과 비유, 새로운 신화나 우화가 부족하다.“라고 말했듯이, “조경의 서술 방식이 충분한가?” 질문하고 비평할 필요가 있다.(3) 이런 맥락에서 조경 분야 스스로가 고유의 언어로 소통한 적이 있는지 질문하며 “조경은 현대적 디자인과 문화를 아우르는 메타언어가 될 수 있다”라고 밝힌 김아연 조경가의 발언은 중요한 비평이다.(4)

조경이 처한 현실에서 바라본, 브랜딩은 독특하다. 전문성이 강한 분야가 브랜딩이라는 필터를 거치면, 사람들이 기꺼이 귀 기울이며 공감하고 기대해서다. 즉, 대중의 인식 속에 대상을 위치시킬 수 있는 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것이다. 이는 브랜딩이 클라이언트를 대신해 메타적인 접근으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비지니스의 존재 이유를 찾아가고, 언어를 선별하며,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정체성과 소신과 철학을 전달’하기 때문이다.(5) 이처럼 대상의 정체성을 만들어 존재감을 드러내고, 대상만의 서술방식을 제안해 대중의 인식에 개입하는 브랜딩의 접근방식을 조경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브랜딩만이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도 조경의 두드러지는 실천은 많다. 브랜딩은 단지 조경이 주목하지 않았던 커뮤니케이션의 공백을 채워낼 하나의 수단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조경을 위치시키는, 커뮤니케이션의 전문적 접근이다. 이제 ‘커뮤니케이션’이 무엇인지 살펴볼 시간이다. 이를 위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Human Communication)이 작동하는 근원적인 작동 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 해보겠다. 보편적인 작동 원리를 다루면 서로 다른 영역인 조경의 커뮤니케이션을 진단할 수 있고, 브랜딩을 이 작동 원리에 기반하여 설명하고 비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커뮤니케이션의 씨줄, 서사. 이야기하는 인간

커뮤니케이션은 발신자와 수용자 간의 정보가 교환되는 관계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지식의 교환이라는 물리적 행위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은 발신자와 수용자 간에 이해, 인식, 행위까지 능동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상징적 행위이기 때문이다.(6) 행위의 주체는 사람을 넘어 동물과 식물, 자연 등 생명 혹은 비인간 간에 이뤄지는 모든 규모의 정보 교환을 포괄한다. 그리하여 기호학과 언어학 등 인문학, 언론학과 경영학 등 사회과학 외에도, 신경과학과 동물학 등 자연과학, 공학에 이르기 까지 학제적으로 탐구되어 온 오래된 주제였다. 다만,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는 ‘서사’라는 독창적인 특징이 있다.

서사란 무엇일까? 서사 개념의 탄생지, 문학에서는 권성징악과 같이 문명사에 전승되고 재생산되어 온 원형의 메세지라는 뜻이 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에서 서사는 ‘인간세상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 있는 스토리가, 플롯이라는 형태로 엮여, 언어를 통해 서술되는 일’이라 정의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7) [스토리/플롯/서술]은 서사의 특성을 보여주는 핵심어다. 스토리는 특정한 인물, 상황, 사실, 환경 등의 정보가 복합적으로 구성된 내용이다. 플롯은 스토리들의 시공간적 정보를 연결하고 압축하고 함축하며 극적으로 포장하는 형식이다(8). 서술을 통해 서사는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지식, 이념, 거짓, 진실, 사실, 감정을 빠르게 퍼트리는 매체가 된다(9). 주목/흥미/압축/전달/발견/기억/전파의 작용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낸 서사는 신화, 전설, 우화 뿐 아니라 역사, 영화, 뉴스, 대화 등 어디에서나 어떤 사람들에게서나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실용적인 도구이다(10).

하지만 서사는 사회적 소통 수단이기 이전에, 인간 인지 작용의 원리이기에 독특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모든 정보에서 논리적 연관 관계를 찾아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다른 말로 정보를 서사적 관계로 조직하는 인지능력에 의존한다(11). 그래서 매력적인 스토리, 플롯으로 조직된 정보일 수록, 우리는 이를 효과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정보의 수집과 이해 뿐 아니라, 자아를 형성하는 방식에도 서사의 원리가 적용되는데, 인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험지를 한편의 서사 구조로 엮어 자아라는 개념으로 정체성을 이해하기 때문이다(12). 이야기 중 청자가 스토리 속 주인공과 동일화 되며 자신의 가치관이 조금씩 바꿔가는 현상은, 외계의 이야기가 흥미를 넘어 종종 서사적 정체성에 균열을 내고 개입함을 보여준다(13). 인간이 서사적 존재라는 말은 단순히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존적이고 실증적인 개념인 것이다.



3. 커뮤니케이션의 날줄, 심상. 시뮬레이션하는 인간

다만 서사만으로 청각/시각/촉각 등 비언어적인 소통을 설명하기 한계가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씨줄이 서사라면 날줄인 심상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서(敍)라는 정보를 ‘상(象)’으로 구성하여 이해하기 때문이다. 심상은 인간의 항상성 유지 과정이라는 신경학적 작용의 산출물이기에, 김학진 신경심리학자의 글을 짧게 인용해보겠다(14).

매 순간 신체불균형에 직면하는 인간은 생존을 위해 불균형을 미리 예측하고 방지한다. 이 실시간 예측과정은 뇌에서 시뮬레이션과 피드백을 통해 이뤄진다. 예를 들어 외부 상황이나 내적인 연상이 인간에게 작용한다고 해보자. 뇌에서는 외계와 신체의 신호를 수집하고 종합하여 상황을 ‘지각’하고, 과거 경험과 개념을 근거 삼아 상황을 ‘판단’하며, 판단의 결과로 항상성 유지를 위한 감정이 구성되고 행동이 ‘결정’된다. 이 과정이 시뮬레이션이다. 시뮬레이션의 결과로 결정된 행동이 항상성 유지를 가능케 했다면 이 보상에 ‘접근하는 행동’은 강화되고, 실패하는 행동이라면 다른 경험을 탐색하게 되는 ‘회피행동’이 강화된다. 이 과정이 피드백이다. 피드백은 점차 경험이 축적되며 자동화 되고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지각과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 편견과 습관, 혐오나 동기와 같은 개념은 자동화된 피드백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심상은 특정한 자극에 일관성을 가지며 구성되는 시뮬레이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심상은 자극에 대한 표상으로서 대표 이미지의 특징을 가지며, 관련된 정보를 주목할수록, 더 많이 생각할수록, 더 높은 해상도로 상기된다(15). 하지만 시각적 양상으로 심상을 국한할 순 없는데, 인간이 종합하고 재현하는 시뮬레이션에는 공감각과 감정이 포함되기 때문이다(16). 무엇보다 항상성에 영향을 끼치는 자극은 신체적 욕구 등 일차적 보상만이 아니라, 돈이나 칭찬 같은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욕구 등 이차적 보상되기 때문이다.(17)

돈을 예시로 이차적 보상의 공통된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데, 돈을 활용해 미래의 불균형을 미리 방지할 수 있고(예측성) 다른 욕구를 통합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포괄성) 욕구가 충족되어도 해소되지 않는다는(영속성) 특징이 있다. 인간이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자극의 범주에 환경 뿐 아니라 사회도 포함된다는 점은, 심상이 인간이 당면한 복합적 현실을 반영하는 개념이며, 거의 모든 현실 세계에 대한 가치판단과 행동지시의 근거로도 기능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4. 브랜딩이 직면한 현실

이제 브랜딩이 커뮤니케이션의 작동원리를 어떻게 다루는지 짧게 정리해보고, 현대 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으로서 브랜딩이 직면한 현실과 역할을 살펴 조경에 대입해본다. 커뮤니케이션의 선두 분야가 당면한 과제와 소명은 후발 주자인 조경에 앞으로의 시사점을 제공할 것이다.

브랜딩은 구별의 핵심인 이름을 짓고 한눈에 알아볼 로고를 만들며 업을 시작한 비쥬얼 커뮤니케이션(verbal+visual design)이다(18). 인상적인 네러티브, 전략적인 플롯, 매력적인 스토리로 언어적 신호를 송출해 고객의 인지와 정체성에 접근해 온 것이다. 또한 언어와 함께 지배적인 감각인 시각을 활용하여 즉각적인 지각을 일으켜 직관적인 심상을 구성해 냈다. 어투와 철학 그리고 그것들을 연상시키는 시각적인 표현 등을 규칙적인 서술 방식으로 제안하는 브랜딩은, 대중의 인식 속에 대상의 존재를 위치 시켰다

커뮤니케이션 분야로서 브랜딩이 직면한 현실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커뮤니케이션 시장이 과열되며, 기업은 더욱 복합적인 양상의 정체성을 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차별화를 위해 기업은 시각과 언어의 상징화를 넘어, 후각, 미디어, 공간 등 다채로운 유형의 상품으로까지 정체성을 확장하고 싶어 한다. 특히 각양각색의 정체성이 종합되어 드러나는 공간은 기업들이 주목하는 새로운 무대이다. 하지만 공간은 온몸으로 체험하는 감각이자, 온갖 것과 소통이 이뤄지는 상황이라는 점에서(19) 제품이나 서비스 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 양상을 띄게 되고, 시각, 제품, 서비스 디자인의 방법론과 전공자로 구성된 브랜딩 업계에서 공간에 대한 전문적 대응은 어려운 실정이다(20). 공간전문가가 브랜딩에 참여하는 경우도 쉽진 않은 듯 하다. 공간이 사람이 생존하는 환경이기 때문인데, 대표적인 공간 전문가인 ‘건축가들은 규제, 예산, 현장의 이슈 사이를 오가며 느끼는 압박 때문에 공간을 사용할 주체나 내부 공간이 아닌 건물 자체를 짓는 일에 관심이 크다‘는 진술은 많은 현실을 함축한다(21).

또다른 현실은 서사와 시장이 결합한 비윤리적인 산업에 있다. 철학자 한병철(22)과 철학책 편집자 박동수(23)은 현대 철학의 관점에서 스토리텔링 산업의 비윤리성의 지적했다. 인간의 삶에 단단한 존재 이유를 제공해주던 고대의 신화, 중세의 종교, 근대의 이념 등 ‘거대 서사’가 저물어 가고, 현대의 개인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의 의지력과 자율성에 기대어 ’이야기 짓어야‘ 하는 자아실현의 온전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반면에 시장은 서사를 활용해 소비를 유도하고자, 무가치한 사건과 자극적인 형식과 확장적인 매체를 생산하는 스토리텔링 산업을 키워갔다. 현대 사회는 고자극과 휘발성의 이야기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투명한 정보와 과학적 사실만이 중시되며 서사의 진정성은 저평가되어 갔다. 개인은 과잉활동성의 환경 앞에 자신의 이야기를 지긋이 엮지 못하고, 모호한 자아에 무력함과 허무함을 느끼다, 자신을 자극하는 이야깃거리에서 소소한 쾌락만을 찾게 되고, 끝내 자신의 서사적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5. 브랜딩의 역할과 조경의 시사점

커뮤니케이션의 현실 속 브랜딩의 역할과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브랜딩은 태생적으로 이질적인 분야와의 긴밀한 협업을 중시 여기는 메타적인 분야로서, 공간 전문가를 포함한 다양한 협업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공간 전문가들이 브랜딩으로 업역을 넓히며 회색지대의 수요를 채워내는 지점도 주목할 만하다. 둘째, 브랜딩이 무절제한 서사소비를 유도하는 윤리적인 서사생산 체계에서, 대안적 서사생산 방식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각자만의 철학을 일관성 있게 실천하는 브랜딩의 서사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양한 삶의 영감을 선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웰니스나 도파민 디톡스 트렌드 속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환경을 절제하고, 명상을 통해 스스로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문화를 일구는 브랜드도 좋은 예이다. 브랜딩은 현 시대에 새로운 서사문화를 이끌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분야로서 브랜딩이 당면한 현실과 역할은 조경에게 다음의 시사점을 준다. 첫째 조경은 브랜딩 분야와의 협업에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분야로 영토를 넓혀갈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혹은 조경이 새로운 브랜딩으로서 브랜드 산업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다. 둘째, 조경은 타분야와 다른 독특한 서사와 심상을 고유하게 다뤄온 문화적 주체로서, 현 사회의 서사 산업체제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성찰하며 이해관계자로서의 역할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조경은 바깥의 삶과 자연에 대해 서사와 심상을 만들어 낸 생산자였다. 동시에 사회의 서사를 활용해 온 소비자이자 공급자였다. 이제 시선을 조경의 분야로 돌려볼 차례다. 조경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다뤄왔는가? 혹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6. 장소성, 참여설계와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공간을 다루는 조경 분야에 커뮤니케이션과 관련 깊은 개념은 ’장소‘이다. 장소란 특별한 쓰임새가 있는 땅에, 특정한 사람이, 특수한 체험을 경험하여, 나름의 의미를 가지게 된 공간이다(24). 장소에 일정 수준으로 시간이 쌓이고 사람들의 체험과 기억이 겹치게 되면 ‘장소성’이 생겨나며 이는 공간 차원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스케일에 따라 장소성은 한 사람의 삶에서 개인이 인식해 온 공간과의 ‘서정적인 관계성’일 수 있다. 공간을 배경으로 몇 세대가 사회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며 집단으로 가져온 ‘지역 문화의 특수성’일 수 있다. 크게는 지질학적 변화 위에서 한 문명이 삶의 터전을 일구며 땅과 관계 맺어온 ‘생태학적 역사성’일 수 있다. 공간이라는 베틀에 서사와 심상이라는 씨줄과 날줄을 사람이 시간과 체험으로 엮고 겹치며 공간과의 관계성을 만드는 문화가 장소인 것이다.

장소성은 조경이 다루는 경관에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우리네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경관이기에(25), 한 집단의 문화적 특성이 ‘경관 정체성 또는 이미지’라는 고유한 무늬로 나타나는 것이다. 동시에 장소성은 없어질 수 있었다. 장소를 만든 시간, 특별했던 공간, 특정한 사람이 사라지고, 관계 맺을 수 없는 공간으로 대체될 경우 장소성은 소멸되고(26) 이는 자아의 상실과 비견되었다. 생물학적인 인간은 장소와 함께 사회적인 사람이 되었고, 사회는 장소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27).

조경은 경관이란 개념 하에 장소성의 덕목을 ‘참여설계‘ 기법과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 이론으로 실천했다. 이는 건축과 도시계획의 관행적인 설계가 장소성을 ‘평탄화’하고 ‘균질화’함에 대한 비판적 실천이었고(28), 이를 중심으로 조경의 고유한 언어를 다면적으로 고민하는 담론의 장이 펼쳐졌다. 참여설계는 공간의 생애주기에 사람들을 참여시키고 권한을 넘기며 사람과 공간 간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 시켰다(29).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은 새로운 도시설계방법론일 뿐 아니라, 도시의 새로운 장소성을 창조하는 실천으로서, 공원의 목가적 이상을 가시화하거나 시각적 질만 개선하는 것을 넘어, 지역의 문화적 특수성을 표상하고 사회생태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창발적인 경관을 설계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창출해냈다(30).

참여설계의 중요성은 나날이 높아지며 다양한 실천들로 고도화되고 있고, 창발적인 경관 개념은 현대의 모든 조경가가 공유하게 되었다.(31) 하지만 장소성의 체현과 창조, 인지적 스케일에서의 상호작용, 비인간과 새로운 소통방식 등 광의의 커뮤니케이션을 다뤄 내기에 이 두 가지 접근으로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참여설계는 참여자의 의존도가 높은 기법적 한계가 있고, 경관의 위상은 제도권 내 자리 잡지 못하여 학제적 수요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도시계획 범주에서 시각적/관리적/시스템적으로만 다뤄지기 때문이다. 도시의 새로운 장소성을 만들던 조경의 경관을 이제는 만나기 어려워진 것 같다.



7. 이론이 아닌 실천에서

하지만 이론이 아닌 실천의 영역에서 서사와 심상, 장소성과 커뮤니케이션을 탁월하게 다룬 사례가 많다. 대다수의 조경가가 인간, 비인간, 땅을 둘러싼 소통방식을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공모전, 대중매체 등 서로 다른 양상에서 조경가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3가지의 국내외 사례를 살펴보자. 앞으로 조경이 다뤄나갈 커뮤니케이션의 단서를 찾을지 모른다.

첫 번째는, 아동문학에서 숲에 대한 인식을 연구해 아동 숲 디자인 키트를 개발한 ‘Fairy Tales to Forest’이다(32). 여기서 조경은 풍경을 매개로 문학적 서사와 심상을 다뤄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조경가의 한계를 실험하는 페이퍼 렌드스케이프 공모 펜실베니아 대학 발행물 LA+(Landscape Architecture Plus)이다(33). 여기서 문학적 기반이 없더라도 조경만의 세상에 없던 서사와 심상을 마치 사고실험처럼 제안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정영선 조경가의 전시와 대중매체 활동이다(34). 여기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와 심상을 만들어 온 조경가가 최근 대중과의 접점에서 식별할 수 있는 주체로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첫 번째, 아동문학에서 배운 숲 - 서사적 풍경

“곰돌이 푸의 위대한 모험을 읽으면 고요하고 친근한 숲이 떠오르지만, 아이들이 숲에서 길을 잃고 마녀에게 거의 잡아먹힐 뻔한 헨젤과 그레텔은 숲에 대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Fairy Tales to Forest 프로젝트 설명서-”

인간이 자연과 상호작용 하는 방식은 때론 실제 자연을 경험하지 않은 어린 시절 접했던 서사를 통해 형성된다. 연구자는 널리 읽히는 아동문학 중 ‘숲’과 ‘나무’를 키워드로 삽화가 있는 작품 112권을 선별했다. 문학이 묘사한 숲의 특성은 ‘서사에서 역할‘, ‘숲의 형상‘, ’캐릭터적 성격’으로 분류했다. 그 결과 [매혹적인], [초대받지 않은], [불길한], [수호자의], [행복한] 등 7가지 주제와 21가지의 숲의 원형을 도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배식을 포함한 아동 숲 설계 및 유지관리 기준을 제안했다.

연구자가 주목한 의식적 작용을 해석해 보자. 사람들은 경관에 담긴 자연과 문학에 담긴 자연을 체험하며 풍경을 떠올리고, 풍경에서 이야기와 표정을 읽어낸다. 그때의 감성과 감정은 기억에 남아 개인이 자연에 대해 가지는 가치관에 영향을 끼치고,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으로 발현된다. 즉, 풍경은 물적 환경이나 서사 속 자연을 인간이 경험할 때, 체험자에게 현상하는, 경관에 대한 서사이자 심상이다. 자연과 인간 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표상하는 체험자의 심적 장소인 것이다.

아동 숲 디자인 키트는 문학적 서사와 심상을 분석하고, 이를 경관의 구성인자로 재해석해, 새로운 심적 장소로서 풍경을 경험적 경관으로 만들어냈다. 이로서 경관 디자인과 문학이 풍경을 매체로서 공유함을 알 수 있고, 문학만이 아니라 자연을 다뤄낸 다른 유구한 문화들과도 조경이 풍경을 매개로 교류할 수 있다는, 문화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경관이 어떻게 서사적 경험을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는지, 풍경이 사람과 자연 간의 정서적 관계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두 번째, 허구적 설계로 사고실험하기 - 페이퍼 랜드스케이프

“이 디자인 공모전은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동물과 살아갈 수 있는지 한편으로 학살과 보호의 이원론을 넘어설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디자인을 통해 우리의 도시, 풍경, 마음을 다른 생물과 더 공생할 수 있도록 열 수 있는지 묻습니다.-생물체 공모전 개요-”

조경은 문학 속 낭만적인 자연을 아득히 넘어서는 새로운 풍경을 창조할 수도 있다. 2017년 LA+는 새로운 섬의 디자인을 공모했다. 당선작에는 북태평양의 ‘플라스틱 섬‘을 다룬 두 가지 제안이 눈에 띈다. 하나는 플라스틱을 생분해하는 박테리아와 밀웜으로 구성된 새로운 해양 생태계, 다른 하나는 플라스틱을 자원 삼은 새로운 도시국가였다. 2022년 또 다른 공모에서는 비인간 생물을 ‘고객‘으로 삼아 디자인을 요청했다. 당선작에는 팬데믹 속 백신 자원인 맹그로브 말굽 투구게를 위한 ‘서식지 섬의 바지선 재활센터‘를 구상하거나, 미국 서부 대규모 가뭄 상황에서 생태적, 공학적 가치가 높은 비버의 댐과 협력적 공존을 제안했다.

이들은 철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정치/환경/문화/경제 등 세계관을 수립하고, 진실을 담을 사건을 궁리해, 인물이나 단체 또는 비인간이 구사할 해법을, 사회생태시스템과 경관디자인의 형식을 빌려, 극적으로 표현한다. 이 공모에 응답한 조경가는 새로운 풍경을 상상해 혁신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실험한다. 경관이 낭만주의와 자연주의라는 시대적 요구에 태동한 실험적 개념임을 떠올린다면,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실험에 조경가가 새로운 경관으로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모와 제안 모두 탈인간중심적 사고실험을 유도했음은 인상적이다. 지금의 세계는 과학의 실증만으로 대응할 수 없는 지구적 위기에 처해 있고, 급속도로 진화해 가는 과학기술에서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이에 예술 분야는 사람이 직접 인지하기 어려운 거대한 규모와 속도의 문제를 미학적 체험으로 재구성하여 사람들이 체험하고 고민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35). 이 무거운 책무를 조경가도 빗겨갈 수 없다. 경관은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는 학제적 담론과 실험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육성에 가까운 정영선 조경가의 언어

“환자가 먼저 ‘내가 빨리 나아야 되겠다’라는 마음이 들어야 하니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가족들한테는 거꾸로 어디서 몰래 숨어서 울 수 있고 병실에서 쉬지 못했던 걸 그늘에서 쉴 수 있고… -정영선 조경가 인터뷰 中 -”

조경은 문학의 서정이나 극적인 상상력이 없더라도, 인간의 가장 내밀한 서사를 다룰 수 있다. 이를 일관되게 조경한 ‘정영선’은 대중에게 고유한 조경가로 기억되고 있다. 소리내 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니 빽빽한 숲이 필요하다, 입원실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기에 봄에 가장 빨리 피는 꽃나무를 심어야 한다.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울 수 있을 거 같은 안온한 숲, 설명을 듣게 되면 가슴으로 이해해버리는, 정영선 조경가의 설계는 육성에 가깝다(36). 그곳의 병아리꽃나무만 보아도, 그의 작품인지 알겠다는 누군가의 진술에서, 풍경에도 조경가의 지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모든 조경가는 프로젝트란 글감으로부터 한 편의 이야기를 엮어내어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한다. 일련의 설계 과정 중 어떠한 정보를 선택하고 배제했는지에 따라 같은 땅이라도 조경가의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간이 흘러 발자취가 된 이야기들을 하나의 궤도로 엮었을 때 조경가로서 한 명의 서사가 탄생한다. 읽기 쉬운 발자국과 발자취를 가진 조경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정영선 조경가가 그러하다.

그녀는 프로젝트를 기술적으로 나열하거나, 트렌드를 끌고 오거나, 땅의 역사를 파헤치거나, 뭇 조경가가 선택할 복잡한 관념이나 개념을 서술하지 않았다. 단지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모습에 제일 먼저 주목하며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사건을 풍경으로 구현했다. 가능한 모든 사람에 가닿을 수 있는, 보편적이기에 비범한 ‘공감‘의 언어가 그녀의 서사이고, 그 따뜻한 이야기가 담긴 풍경이 그녀의 심상이다.



8. 어떠한 풍경을 사람들에게 남겨 주고 싶은가?

앞선 사례는 조경이 개인의 서정과 자연관에 문화적으로 개입하고, 선언적인 사고실험을 이끌며, 영향력을 가진 독립된 주체로서 조경가가 대중과 소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조경가는 고유하고 특수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견지하고 있다. 단지 이런 특별한 기술을 담아낼 개념이 부족했다. 과학적, 시스템적, 거시적 역할로 벅찬 ‘경관’에 부담을 짓지 않고, 의미론에 가둬지기 쉬운 ‘장소’를 보완하며, 참여자와의 더욱 창발적인 참여설계를 가능케하는 개념이 있다면 어떨까. 그것에 ‘풍경’을 사용해 보길 권해본다. 앞선 분석에 풍경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했던 건 단순히 서정의 느낌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연과 사람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의식적, 서사적, 매체적 작용을 설명할 때, 경관을 보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개념어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풍경은 경관이 다소 건조한 표현일 때 대체어로 사용된다. 하지만 풍경은 경관을 지각하며 현상하는 의식적인 개념이다. 태초에 문학과 회화에서 시작되었다는 기원은 허구적 상상과 가상의 체험을 다뤄낼 수 있는 예술적 개념으로서 가능성을 반증한다. 무엇보다 대중에게 ‘정원’만큼이나 익숙한 표현으로 매체로서 잠재력을 가진다. ‘어떠한 풍경을 사람들에게 남겨 주고 싶은가?’, 이 질문이 조경의 실천에서 유의미하다고 믿는 조경가라면, 풍경이 가진 잠재력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풍경이 조경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개념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풍경을 둘러싼 이론이 갖춰져야 하고, 그것을 활용한 기법이 유용해야 하며, 그것이 가지는 확장성이 있어야 한다. 이론, 기법, 잠재력의 측면에서 풍경의 개념으로 시도해야 할 과제를 제안해 본다.

1) 이론으로서 환경심리학과 환경미학

첫째, 경관이라는 대상과 행위가 체험자에게 풍경으로 현상하는 의식적 작용을,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 경관의 원리를는 주로 ‘바라보는’ 대상과 행위라는 시각적 범주로 제한하곤 한다. 바람을 맞는 듯한 풍경의 공감각과 같이, 온몸의 감각으로 경관을 지각하고 인지했을 때, 개인은 어떻게 풍경을 떠올리고 기억할까? 앞으로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며 그 형질을 바꾸어 갈까?

최근 신경과학계는 숲, 수면, 동물과 마주침 등 자연의 공감각적 요소와 인간의 인지적 작용 간 관계를 탐구하여, 자연 경험이 우리에게 어떤 혜택을 주는지 규명하고 있다.(37) 뇌과학과 신경과학이 환경의 구성인자를 분석적으로 탐구하여 지금 시대의 실증적 근거를 쌓아간다면, 환경심리학과 환경미학은 이를 ‘경관이 풍경이 되는 미적 경험’으로서 종합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38). 이는 조경이라는 특수한 분야의 경험모델을 확립하는 이론이 될 수 있고, 설계자의 감성적 개념을 이용자의 실제적 체험으로 정합하게 구현하는데 실증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이때 개인을 넘어 지역공동체 그리고 사회에게 생겨나는 공동의 풍경도 고려 대상이어야 한다.

2) 기법으로서 조경브랜딩

둘째,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조경의 특수성과 연결 짓는 탐색적 연구와 기법 개발이 필요하다. 조경은 정치적 의제와 대중적 관심에서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39) 식별되어야 한다. 작은 정원부터 공간사업과 조경 정책에 이르기까지, 이것들이 대중과 시장의 각축장에서 주목할 만한 실체로 등장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마케팅적 기법을 활용하면, 조경의 전문화된 소통 방식을 대중의 레벨로 조정할 수 있다. 고객경험의 관점에서 서비스 방법론을 접목하여 조경의 가치와 혜택을 가시화할 수 있고, 공간브랜딩으로 업역을 확장해볼 수 있다. 참여설계에 있어도 유용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브랜딩은 발주자의 참여와 숨은 뜻을 효과적으로 끌어내고 이용자의 니즈를 발견해 내는 독창적인 방법론이 있기 때문이다.

3) 잠재력으로서 사고실험

셋째, 풍경의 예술적이고 실험적인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토대와 이론이 마련되어야 한다. 계급만 있던 시절 낭만적인 소설이 독자들에게 평등을 간접적으로 체험시켰기 때문에 인권의 발명이 가능했듯이(40), 데이비드 소로와 옴스테드가 각자의 방식으로 자연의 풍경을 서술했기에 인간과 자연의 보다 생태적인 관계가 정립될 수 있었다(41). 풍경을 개척해 낸 이들이 기후 위기로 점철된 지금에 살고 있다면, 그들이 상상할 풍경은 낭만적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지금의 현실에서 목가적 풍경은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때로는 비윤리적이기도 하다.

조경의 관점에서 서사와 심상의 허구성은 다음을 가능케 한다. 곤충, 동물 등의 비인간에게 과학적 모델로서 타자가 아닌 주체로서 발언권을 제공할 수 있다. 기술적 전환점이 도래한 미래의 도시 속 기계가 주체가 되고, 인간은 타자로서 살아가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기술, 인간과 인간 간의 사고실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조경가의 사고실험이 언제나 경관으로 구상하고 풍경으로 구성한다는 점이다. 이는 과학자의 탐구나 예술가의 표현으로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조경가의 실험적인 직능이다. 시스템적이며 재현적인 이 같은 시도가 학생이기에 할 수 있는 공상이 아닌, 노련한 조경가가 세상에 내놓는 발칙한 상상이자 선언으로 받아 들여지고 논의되기 위해서, 공론의 토대와 기법적 탐구가 필요하다. 예시로 페이퍼 렌드스케이프와 시나리오 설계 등 예술적 경관 설계기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9. 조경의 언어는 안녕하고 충분한가

조경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사명이자 과제는 자연과 사람, 자연과 사회, 자연과 문명,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 사람과 기술 간의 건강한 관계를 고민하고 이들이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게 함께 발맞춰 나아가는 일이다. 고대 자연은 신화의 장소이자 범접할 수 없던 공포의 대상이었고, 과학적 이성이 등장할 땐 자연은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산업화에서는 지저분한 도시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낭만과 안전의 이상향이었고, 현대의 자연은 몰이해와 무관심 그리고 방관 속에 방치되거나, 우리에게 보이지 않은 곳에서 통제되고 착취되는 자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자연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련하고 강력한 악당이 된 시대에서, 조경의 역할은 분명히도 섬세하고 장대해야 한다. 다만, 조경이 만들어 갈 수 있는 문화는 대중과의 서사 공동체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한 소통의 수단이자 정체성으로서 조경의 고유한 언어를 고민하는 일은 중요하다.


너무 많은 걸 담으려 한 글이라는 평가가 예상된다. 필자는 학부 시절부터 자연관, 풍경, 시나리오 기반 설계, 인간성 등의 주제를 병치시키며 관심을 가져 왔다. 하지만 필자가 조경분야를 둘러보기에 이 주제들을 함께 고민할 기반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었다. 이들이 어바니즘, 생태, 미학과 같은 위상의 쟁점으로 동등하게 논의 되고 있지 않았음을 느꼈을 때, 내가 서볼 자리를 언젠가 스스로 만들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장대한 글을 쓰게 된 배경이다.

서사가 무조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서사는 자아를 비대하게 하여 세계와 개인의 벽을 두껍게 만들기 때문에, 사람 대 사람, 인간 대 비인간의 경계를 강화할 수 있다. 다만, 논의가 필자의 그릇보다 너무 커지지 않기 위해, 시선을 서사로 좁혀 적었다.




0. 끝으로, 그리고 다시 시작

3부작을 쓰겠노라 큰소리가 죄송하게도 이제야 글을 써 낸다. 가능한 모든 경우를 탐구하지 않고, 경험으로 검증하지 않은 글은 부끄럽게 느껴지는 성격 때문이다. 필자는 쓰고자 하는 바를 학습으로 키우고 고민으로 벼리며 글을 쓰다보니, 모든 글이 짧고 좁은 사회생활을 일반화하는 실수가 될까 조심스럽다. ‘조경은 공간과 경관에 주목하느라 경험을 주목하지 못했다.’는 환경과조경 기고문 처럼, 결국 스스로의 성찰을 일반화 해버렸듯이.

누군가는 1부를 3번 쪼개면 되었을 일이라 말했고, 휴대폰으로 보기 어려운 형식이라 아쉽다고 조언했다. 2부도 똑같이 긴 글을 쓰는 걸 보면 이 성격으로 쓰게 되는 글과 월간테라는 맞지 않을지 모른다. 반기테라라면 적합하려나. 마지막 3부는 아마 몇 개월은 더 필요할 듯 하다. 그 때 까지 고민과 실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니 너무 못나게 바라봐주지 않으시길 바란다. 월간테라를 빛내줄 다른 동료의 글을 기대하며, 3부에서는 다시 브랜딩을 통해 조경이라는 거대한 지도 위 한 발자국을 내디뎌 보겠다.




*참고문헌
(1) 로버트 콕스(2013), [환경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북스
(2) 테리 바렛 (2021), [미술비평], 아트북스, 재인용. 저자는 “미학적 소통이라는 짐을 오롯이 예술가들만 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다른 비평가(브루디, 1951)의 주장을 인용하여, 미술비평은 예술가 뿐 아니라 대중과 비평가에게도 중요함을 밝혔다.
(3) 올가 토카르추크(2022), [다정한 서술자], 민음사
(4) 김아연(2022), [IFLA 세계조경가대회 기조강연(3) 김아연 서울시립대 교수], 라펜트
(5) 조수용(2024), 일의감각 REFERENCE BY B
(6) 로버트 콕스(2013), 위의 책
(7) 장순란(2017), [서양문학연구로서의 서사이론과 서사학].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8) 한병철(2023), [서사의 위기], 다산초당
(9) 유지원(2019), [글자 풍경(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을유문화사
(10) 장순란(2017) 위의 책
(11) 자미라 엘 우아실 외1인(2023),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원더박스
(12) 그레고리 번스(2024) [나라는 착각, 뇌는 어떻게 인간의 정체성을 발명하는가], 흐름출판
(13) 자미라 엘 우아실 외1인(2023), 위의 책
(14) 김학진 외 6인(2021), 단 하나의 이론, 알에이치코리아
(15) 박충환 외 2인(2017), [브랜드 어드멀레이션], 시그마북스
(16) 리사 펠드먼 배럿(2017),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생각연구소
(17) 김학진 외 6인(2021), 위의 책
(18) 홍성태(2022), [브랜드로 남는다는 것], 북스톤
(19) 조성익(2024), [건축가의 공간 일기], 북스톤
(20) 브랜딩용역을 추진하는 과정 중 롯데건설 브랜드 담당과 논의에서 얻은 결론이다
(21) 매거진B 편집부(2022), No.16 : 이솝 (Aesop), 제이오에이치
(22) 한병철(2023), 위의책
(23) 박동수(2022), [철학책 독서 모임(오늘의 철학 탐구)], 민음사
(24) 황기원(2011), [경관의 해석, 그 아름다움의 앎],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5) 위의 책
(26) 김광현(2018),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뜨인돌
(27) 김현경, 2015,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이 책에서 장소의 개념은 인간이 공동체로부터 구성원권을 획득하여 사람으로 인정 받게 되었을 때, 그가 점유할 수 있는 사회적 의미의 공간으로 장소의 개념을 확장하여 이해해야 한다.
(28) 찰스 왈드하임 외13인(2007),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도서출판 조경
(29) 이언H.톰프슨(2023), [조경], 교유서가
(30) 찰스 왈드하임 외13인(2007), 위의 책
(31) 김아연외27인(2021),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한숲
(32) ASLA(2017), https://www.asla.org/2017studentawards/333827.html
(33) LA+,2020, https://laplusjournal.com/LA-CREATURE_ABOUT
(34) 서울아산병원, 2024, 유튜브, https://youtu.be/coBJJnmr208?si=pOjlReif_M-DEJdP
(35) 박범순(2022), 인류세 시대, 미술관의 역할은 무엇인가? 초객체와 과잉문화 직시하기, 국립현댐술관 다원예술 2022 미술관 탄소 프로젝트
(36) 신형철(2022), [인생의 역사], 난다. 정영선 조경가는 진정 땅의 쓰는 시와 같은 조경을 하였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시를 인간의 육성과 가장 가까운 언어라 묘사했기에, 이를 빌려 정영선의 조경을 육성에 빗대었다.
(37) 미셸 르 방 키앵(2023), [자연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뇌과학이 밝혀낸 자연이 선물하는 만족감의 비밀)], 프런트페이지
(38) 임승빈, 주신하(2019), [조경계획.설계], 보문당. 본 책에서 전통심리학과 환경심리학 및 환경미학의 비교를 활용하여, 최근 신경과학과 대치시켰다.
(39) 이언H.톰프슨(2023), 위의 책
(40) 자미라 엘 우아실 외1인(2023), 위의 책
(41) 이언H.톰프슨(2023), 위의 책

Copyright © 2025. STUDIOS terra all rights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