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lum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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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 2017. STUDIOS terra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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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Instal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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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이
(진소형)
1
나의 꿈은 중학교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때는 단순히 그림 그리는 게 좋으면 장래희망 칸에 ‘디자이너’라고 쓰는 줄 알았다. 그땐 그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이었다. 내 꿈이 왜 조경디자이너였을까를 생각해보면, 건축 일을 하셨던 아빠의 영향이 컸다. 아빠는 늘 나에게 건축 도면을 이면지로 가져다주셨다. 웃기게도 나는 하얀 뒷면에 그림을 그리지 않고, 꼭 도면 위에 집을 꾸미듯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다.
어느 날, 엄마는 나에게 ‘조경’이라는 분야를 제안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간은 오히려 내 인생에서 꽤 중요한 지점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보니 학부는 조경학과로 가지 못했지만, 대학원은 조경학과로 진학했다. 방황하던 시기에 김아연 교수님과 진로 상담을 했고, 그분 밑에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선택했다. 아직도 그때 주고받았던 이메일을 나는 가지고 있다. 진학 후에는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달았고,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내가 알고 있던, 또 해오던 사고방식의 부족함을 마주하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성취감과 만족도도 컸다. 그렇게 나는 조경가가 되었다.
2
대학원에 다닐 때 한 학기 선배가 있었다.
봄에 길을 나란히 걸으면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선배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봄에 새로 돋아난 새싹들이 너무 귀여워서, 하나하나 인사를 하느라 발걸음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둣빛 새잎을 보며 연신 “귀엽다”를 반복하던 그 선배가, 지금의 내 남편이다.
선배는 과제를 하다, 논문을 쓰다 막히면 혼자 ‘시대텃밭(서울시립대 100주년 기념관에 있는 실험정원)’에 다녀오겠다고 나가곤 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왔다. 혼자 잡초를 매고 온 것이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세상에, 저런 사람도 있구나.’
사실 내가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많이 식물을 알게 된 것도 선배 덕분이다. 우리는 등을 지고 앉는 자리였고, 사이에는 회의 테이블 하나가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의자를 돌려 앉으면 자연스럽게 수다가 시작되었다. 식물과 생태에 관심이 많던 남편은 툭하면 식물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어느새 주입식 교육처럼 그 이야기들이 스며들었다. 졸업 후 각자 설계사무소에서 일을 하다가, 우리는 이제 함께 ‘천이’라는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3
‘천이’라는 이름은 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지었다.
우리의 지금은 마치 나대지에 씨앗 하나가 날아와 뿌리내려 초원이 된 정도의 아주 초기 단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지고, 결국에는 견고한 숲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이름을 선택했다.(남편은 여기에 생태적으로 안정된 조경 공간을 만들겠다는 디자인적 가치도 담겨 있다고 말한다. 물론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스튜디오 천이는 주로 설계 작업을 한다. 우리의 작업 과정은 언제나 대상지가 본래 가지고 있는 특성을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그곳에 어떤 잡초들이 자라고 있는지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잡초의 종류를 보면 땅이 촉촉한지 건조한지, 햇빛이 어떻게 들고, 바람은 부는지, 직접 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환경들을 읽는다. 또한 과거의 맥락을 따라가며 그 장소가 지닌 잠재력과 가능성을 상상한다. 빛을 어떻게 사용할지와 공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그리고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갈지를 함께 고민한다.
4
우리는 설계를 비롯해 시공, 도시계획, 기획, 교육까지 다양한 일을 한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도 분명 좋은 선택이지만, 여러 영역을 넘나들다 보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갇히지 않게 해준다고 느낀다. 그래서 지금은 의도적으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식물 스터디도 운영 중이다. ‘식빵(식물공부방)’이라는 모임을 남편과 함께 2023년부터 시작했다. 조경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식물에 대한 갈증을 느낄 것이다. 아무리 공부해도 종류는 끝없이 많고,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눈에 담고 싶은 공간도 너무 많다. 둘이서만 하기에는 벅차다는 생각이 들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시작했다. 여럿이 모여 아름다운 공간을 직접 보고, 식물 동정과 경관에 대해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나누는, 점점 확장되어 가는 창구 같은 모임이다. 2023년에는 ‘습지’, 2024년에는 ‘숲’을 주제로 진행했고, 올해부터 내년까지는 습지에 모니터링과 아카이브를 더해 세 가지 주제로 이어가고 있다.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자연형 습지 두 곳을 매달 찾아가며, 그곳에 살아가는 생물종과 변화하는 풍경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부탁받은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부지런히 그곳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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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득 내가 어른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순간 스스로 아직 어른이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자주 찾아온다. 작년까지만 해도 결혼 준비로 분주했고, 재작년에는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 엄마의 걱정을 샀던, 그저 철없던 딸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걸까 싶다. 어쩌면 결혼이, 어쩌면 사업이, 또 어쩌면 이별이 나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작업소를 시작한 뒤부터는 주말 아침에도 군말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를 일로 채운다. 처음 해보는 일 앞에서도 두려움보다는 용기를 먼저 내본다. ‘직원을 뽑는다면 어떨까?’라는 가정을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아 수십 번 고민하고, 이제는 내가 책임져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또 다른 순간들에서도 스스로를 깨닫는다. 드라마 속 따뜻한 장면에 괜히 눈물이 차오르고, 지겹게만 느껴졌던 엄마의 잔소리가 애틋해지고, 아빠의 엉뚱한 농담은 웃음으로 바뀌며, 할머니의 고집 앞에서는 그저 들어드리고 싶어진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야 마음 깊이 알게 된 것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문득 든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나답게 살아갈지, 내 삶을 어떤 방식으로 채워갈지를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공감으로 남고,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조용히 지나가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한다.